우정이 철천지 원수로-데카르트와 파스칼(1)
데카르트와 파스칼, 이 두 사람은 근세 합리론의 대표자들로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파스칼(1623년~1662년)은 법관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특히 수학에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파스칼은 세 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옮겨 간다. 그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이름난 학자들을 초대하여 아들에게 과학적 토론을 듣게 한다. 이 덕분인지 파스칼의 수학적 재능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나타났다.
비록 학교 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혼자 공부하여 유클리드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6세 때의 연구 성과물인〈원추 곡선론(圓錐曲線論)〉은 데카르트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파스칼은 아버지가 하는 세금 업무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계산기를 고안, 1642년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열정적 연구로 인하여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말았다. 그 결과 18세 때부터 서서히 발병(병이 생김) 증세를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진공(아무 것도 없는 상태)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토리첼리(1608년~1647년)가 1643년 로마에서 유리관과 수은을 사용하여 ‘토리첼리의 진공’을 발견하였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파스칼은 약 1년 동안 모든 시간과 정력을 이 실험에 집중하였다. 그 결과, 그의 독자적인 실험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여 ‘근대적인 물리 실험법의 창시자’로서 명예를 얻게 되었다.
얀센주의 신앙(신의 은총에만 의지하여 도덕적 엄격주의를 지켜 나감)에 접하여 최초의 회심(回心, 죄악의 삶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변화)을 경험한 파스칼은 1647년 건강이 나빠져 파리로 갔고, 이곳에서 27년이나 연상인 데카르트의 방문을 두 번 받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 사이에 진공의 본질에 대한 의견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이듬해 파스칼이 기압(공기의 무게로 인해 생기는 압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험을 했는데, 데카르트는 그 실험을 시사(示唆)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며 파스칼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스칼 역시 그 실험은 자기 자신의 착상이라고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모두 17세기의 프랑스가 낳은 천재적 사상가들이었다. 하지만 물리학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인생관, 세계관 또는 신과 진리를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너무나 달랐다. 데카르트가 이성(理性)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는 철저한 합리주의자라면, 파스칼은 이성을 존중하면서도 그 한계를 분명히 인정하는 사상가였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였지만, 파스칼은 오히려 “오만한 인간이여! 신의 말씀을 들어라.”고 충고한다.
전자(데카르트)의 신은 이성으로 생각되는 철학자의 신인 데 반하여, 후자(파스칼)의 신은 심정으로 느껴지는 종교인의 신이다. 데카르트의 회의(懷疑, 의심)가 학문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적 회의였다면, 파스칼의 그것은 종교적 진리에 육박하기 위해 신음하면서 탐구하는 회의였다. 이에 파스칼은 데카르트를 분명히 반대하는데,『팡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신 없이 지나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세계에 운동을 주기 위해서, 신으로 하여금 한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그에게 신이 필요치 않았다.”(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강성률 철학티비’, ‘강성률 문학티비’, 블러그 ‘강성률철학아카데미’ 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