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사진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일이 있다. 바로 현암 이을호 선생의 재조명이다. 영광의 들녘과 바다에 한 시대를 꿰뚫는 사상가의 숨결이 아직 남아 있기에 그렇다. 현암 이을호 박사(1910~1998). 그는 의사(醫藥), 학자(學者), 그리고 사상가였다. 한 사람의 이름 앞에 이렇게 수식어가 겹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한길만을 걷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늘 우리 민족의 길을 묻고, 우리 사유의 근원을 탐구했다.
이을호 박사는 영광에서 태어나 일찍이 한문과 경서를 익혔다. 일제강점기의 억압된 현실 속에서도 그는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배우고 또 가르쳤다. 젊은 시절에는 약학과 한의학을 공부해 ‘호연당(浩然堂)’이라는 약국을 열고, 병든 몸뿐 아니라 상처 입은 시대의 정신을 돌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점차 몸의 치유에서 사상의 치유로 옮겨갔다. 그것이 바로 다산 정약용 연구로 이어진 학문의 전환점이었다. 선생의 저서 ‘다산의 역학’은 30년째 내 서가에 꽂혀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완독하지 못하고 있다. 한글이 한 자도 보이지 않는 경서의 부담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학이라는 분야의 전문 서적이 넘치게 나와 있는 원인도 한몫한 셈이다. 한국에서 다산학을 이을호 박사만큼 해 낸 이가 있을까. 그래서 아직 이 책은 나의 필독서이다.
현암의 사상은 한마디로 ‘민족의 사유 복원’이라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중국 중심의 유교 체계를 답습하는 대신, 한국의 풍토와 현실 속에서 유학을 다시 읽었다. 다산 정약용을 실학자로서가 아니라 ‘개신유학자(改新儒學者)’로 재평가하며, 유교를 현실 사회의 개혁과 민생의 실천 속에서 새롭게 해석했다. 그는 유학이 단지 도덕의 학문이 아니라, 백성을 살리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실천 철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저서 ‘다산학의 이해’와 ‘정다산의 생애와 사상’은 한국 실학 연구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단순한 학문적 해석을 넘어서 있었다. 그는 “사유의 중심을 되찾아야 나라가 선다”라는 신념으로, 우리 정신의 독립을 주장했다. 이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왜곡된 조선 사상을 바로잡고자 한 시대적 응답이었다. 선생은 또한 ‘한(恨)’과 ‘한(韓)’의 개념을 통합적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말한 ‘한사상(韓思想)’은 단지 슬픔이나 응어리의 감정이 아니라, 고난을 견디며 새 생명을 낳는 정신적 힘이었다. 그는 이 ‘한’을 우리 민족 고유의 사유로 해석하며, 한국철학의 독자적 기초를 세우고자 했다. 다시 말해, 그의 사상은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미래의 한국학을 여는 작업이었다. 또한 그의 삶은 곧 실천이었다. 해방 이후 그는 고향에 민립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을 맡았고, 전남대학교 교수와 국립광주박물관 관장을 지내며 학문과 교육의 현장을 연결했다. 교단 위의 학자이면서 동시에 지역의 스승이었던 그는 지식이 곧 삶의 도리이며, 학문은 공동체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선생의 학문은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빠른 경제 성장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유의 뿌리를 잃어버린 지금, 그의 철학은 다시금 묵직한 울림을 던진다.
영광은 천년의 불교문화와 수많은 인물의 향기를 품은 고장이다. 그 가운데 현암 이을호 선생은 영광이 낳은 가장 빛나는 사유의 장인이라 할 만하다. 그의 철학은 한 지역의 자긍심을 넘어, 우리 민족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거울이다. 현암의 사상을 기리는 것은 단순한 추모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의 학문이 추구한 인간적 성찰과 민족적 자존의 정신이 오늘의 영광에서 이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현암의 뜻을 계승하는 셈이다. 학문과 삶이 하나였던 그의 발자취를 따라, 이제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사유하는 시민, 실천하는 영광인’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