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년 전 ‘호구총수’ 기록과 일치, 건물지·계단식 석축·우물 터까지

고도도봉수 봉수군 마을 우물터
고도도봉수 봉수군 마을 우물터
조사지역 조사 후 원경
조사지역 조사 후 원경

영광 고도도 봉수 인근에서 조선시대 봉수군(烽燧軍)의 실제 거주지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굴됐다. 문헌에만 존재하던 봉수군마을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광군은 최근 열린 영광 고도도 봉수 봉수군마을 시굴조사 자문회의에서, 호구총수(1789)에 기록된 봉수군의 거주지로 전해지는 고도도 봉수 봉수군마을(봉수동)’ 터를 전국 최초로 확인했다고 18일 밝혔다.

이번 시굴조사는 2024년 학술지표조사에서 문헌과 지역 주민 증언을 바탕으로 추정된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이뤄졌다.

조사단은 고도도 봉수 남쪽 약 30분 거리의 산 경사면 말단부를 중심으로 3개 구획을 시굴한 결과, 조선시대 건물지로 보이는 석렬(石列), 8~9단 규모의 계단식 석축, 현재도 물이 솟는 우물 터를 확인했다.

이는 해당 장소가 단순한 봉수 관련 흔적을 넘어 실제 거주가 가능했던 생활공간임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특히 조사지점은 고도도 봉수로 이어지는 봉수로의 시작점에 위치하며,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이 일대가 봉수동(烽燧洞)’으로 기록돼 있어 봉수를 관리하던 봉수군이 거주했을 가능성을 높인다. 조사단은 봉수군마을로 기능했을 개연성이 매우 크다고 평가했다.

영광 고도도 봉수는 조선 제5로 직봉노선의 23번째 연변봉수로, 여수 돌산도에서 시작해 서울 남산(양천 개화산 봉수)까지 이어지는 서남해안 방어체계의 중추였다.

봉수군은 봉수대에서 횃불을 올리거나 후망(候望)을 담당한 군사로, 봉수마다 약 100명 규모로 구성되며 5명이 5일씩 윤번으로 근무하는 체계로 운영됐다.

이번 봉수군마을 확인은 조선 봉수군의 생활 구조·근무 체계·사회경제적 기반을 복원할 수 있는 첫 물적 증거로 평가된다.

그동안 봉수 연구는 봉수대와 통신망 중심으로 이뤄졌으나, 실질적 생활공간이 규명된 사례는 없었다.

영광군 관계자는 향후 봉수군마을과 봉수로에 대한 연차적 학술조사를 지속하고, 사적(5로 직봉영광 고도도 봉수 유적) 지정 확대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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