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5천여 희생자, 피해접수는 97건

2만5천여 희생자, 피해접수는 97건



영광신문은‘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송기인 위원장이 지난 2월 15일 위원회의 고위책임자들과 함께 영광을 다녀간 것을 두고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보도했다.


 


장관급인 위원장이 희생자 접수가 끝나자마자 제일먼저 우리지역을 방문했던 것도 그렇지만 유가족 대표들과의 간담회에서 밝힌 그의 방문사유에서도 순회차원의 단순방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례적이랄 수 있는 송위원장의 전격적인 방문은 그동안 자료나 언론보도에 의해 밝혀진 전쟁 희생자 수에 비해 영광지역의 피해신고접수가 극히 적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사위원회는 2005년 5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그해 12월 1일부터 2006년 11월까지 1년여에 걸쳐 전국을 대상으로 피해신고를 접수했다.


 


하지만 우리지역의 피해신고접수는 97건으로 위원회에서 자체적으로 수집한 자료나 지난 날 일부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난 영광지역의 피해상황과는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혹 외압이나 유가족들의 피치 못할 곡절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직접 확인 차 들렀다고 했다.


 


이에 유가족들은 홍보부족과 함께 당시의 상황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일 수도 있었던 우리 지역만의 특수상황을 예로 들며 서로 상처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피해접수를 포기해버린 경우도 많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곁들였다.


 


희생자, 2만1,225명


2002년 4월호 월간조선은 6,25 동란 중 영광지역에서 희생된 희생자 2만1,225명의 명단이 수록된 인명부를 입수했다며 당시 우리지역의 피해상황에 대해 생존자들의 생생한 인터뷰와 함께 특집 보도함으로써 큰 충격을 주었다.


 


3만명 이상이 희생을 당했다거나 혹은 2만명쯤일 거라며 그 동안 소문과 주장으로만 떠돌던 희생자의 숫자가 공인된 정부의 공보처 통계국에 의한 기록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그 충격은 강도를 더해주었다.


 


단, 정부문서 보관소에 보관된 기록일 뿐 실재로는 더 많은 피해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보면 송위원장의 방문이 극히 이례적인 일만은 아님이 분명하다.


 


9,28 수복 후, 정부가 치안공백을 유도?


9,28 수복 후, 정부에서 특수군사작전을 위해 영광지역에 일부러 치안공백상태를 유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지역이 전국적으로도 가장 많은 희생자가 있었으면서도 어느 일방에 의한 피해라기보다는 좌,우 양측에 의해 서로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상황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그 주장은 매우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을 탈환한 UN군은 북으로 진격을 하면서 남한 전역에 남아있는 빨치산 잔당을 소


탕하고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청년단체 등 우익단체를 조직하여 치안유지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우리지역 영광에는 흑인이 섞인 미군 일행이 차량을 이용해 잠깐 지나치면서 염산교회 등의 대학살을 불러온 환영행사가 있었을 뿐 그 이후론 전혀 치안유지가 안된 공백상태였다는 것이다.


전쟁 전 이미 북한군이 우리지역에 잠입했었다는 주장과 함께, 영광의 불갑산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간 빨치산과 연계하기 좋은 지정학적인 위치일 뿐만 아니라 일부 빨치산의 거두가 우리지역출신이었다는 점 등을 빌미로 당시 군 당국에서 우리지역을 일부러 치안공백상태로 만들고 빨치산 잔당을 끌어 들여 소탕할 작전을 세웠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영광을 고기 잡을 그물로 이용 


시냇가에서 고기를 잡을 때에는 고기들이 쫓겨 도망갈 퇴로에 미리 그물을 쳐놓고 사방에서 소리를 질러 그물 쪽으로 고기를 몰아간다.


 


갑자기 충격을 받은 고기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갈 길을 찾다가 가장 안전하고 조용하다고 판단되는 길 즉, 그물이 쳐진 죽음의 지역으로 도망을 하다가 결국 잡히고 만다.


 


당시의 정부에서도 빨치산 소탕을 위해 이런 물고기 몰이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까?


영광을 그물막이로 삼아 각지의 빨치산 잔당들을 우리지역으로 몰아 들여 소탕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빨치산 잔당의 소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와중에 선량한 민간인들이 대량 학살되었다는 것은 이미 정부기록에 의해 확인이 되었다.


특히 2,500여명에 달하는 어린아이들이 전쟁희생자명단에 끼여 있는 것을 보면 이는 단순한 좌우 대립에 의한 피해라기보다는 고기몰이작전에 따른 희생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잉어를 잡기위해 쳐놓은 그물에 애꿎은 송사리나 모래무치 등 전혀 종류가 다른 물고기들이 같이 걸려들어 희생을 당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하루빨리 전 국토를 수복하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빨치산 잔당의 소탕이 필요했을 것이며 이와 함께 약간의 민간인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는 군 당국자들의 주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정부에서는 빈대 몇 마리 잡기위해 초가삼간을 태웠다는 비난에서 결코 자유롭지는 못할 것 같다.


 


국가의 진실조사와 함께 사죄를


위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반드시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민간인들의 피해접수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노근리 사건이나 4,3 제주항쟁, 함평양민학살사건처럼 정부가 나서 진상을 밝히고 결과에 따라 유가족들에게 정부차원의 사죄와 함께 배상이 뒤따라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빨치산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국가에서 버린 땅이었기에 토벌작전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영광지역 양민들은 좋든 싫든 양측으로부터의 학살을 면할 길이 없었다.


 


정부의 고기몰이 작전에 말려 이념이 무엇인지 조차도 몰랐던 선량한 민간인들은 때로는 좌익으로 때로는 우익으로 몰려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을 겪어야 했으며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제 이 원혼들을 위해 남아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 또한 분명해졌다.


이제는 갈등과 반목에서 벗어나 서로가 용서하고 화해함으로써 희생자들의 넋을 기려야 할 것이며 전 군민이 나서 구천을 헤매는 원혼을 달랠 위령탑을 세우고 위령제를 지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동안 진실이 숨겨진 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 온 가족이 망신창이가 되었으면서도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말 하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던 희생자 유가족들의 가슴앓이를 치유하기 위해 국가차원에서 사죄하고 배상을 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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