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근자열’ 하고 ‘원자래’ 할 것이니라.

 「이미 떠난 자에게는 눈물을, 그리고 살아남은 자에게는 웃음을 각각 선사하기로 힘써야 할 것이다. 살아있는 자에 웃음의 선물을 보내기에 인색하지 말라! 살아있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라! 살아있는 동안 죽음이란 없는 것, 설령 그것이 날 데리러 온다 해도 그 순간 나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도 두려워 할 줄 모른다는 것, 그러니 이 반갑지 않은 손님까지 최후의 미소로 반길 수 있도록, 우리는 부지런히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철학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오늘도 다짐해 본다.」- <내가 사랑한 나의 삶> 서장 中에서 





학자로서의 정종




한 세기에 이르는 생을 누리는 사람이 여기 한 사람 뿐이겠는가. 다만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삶을 살아왔는지 지난 삶의 노정을 살펴볼 때, 영광 근현대사의 증언자로서, 쉼없이 샘솟는 고향사랑의 소유자로서 살아온 이가 이 분 말고 또 있을까 싶다. 온버림 정종.


정종박사는 1915년 9월 영광읍 도동리 324번지에서 태어나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배재고, 중앙불교전문학교를 거친 뒤 일본 동양대학 철학부를 나온 이 지역이 낳은 불세출의 철학자이다.


 


버림의 철학, 자유의 철학




「참으로 버린 자에겐 자유만이 남게 된다. 자유있음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에게, 다시 말해 어떠한 것이거나 <없음>에서만 잉태되기 때문이다. 나는 죄다 버렸다.」 그의 아호가 ‘온버림’인 연유는 스스로 자유임을 선포하는 것이자 무욕의 삶을 통해 후회없는 삶을 살고자 했던 발로였을 터이다.


온버림 정종은 그의 평생의 철학적 주제이기도 했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후회없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라고...  후회없는 인생의 경영을 위해, 고뇌하고 이를 초극하기 위한 결단의 무한 반복, 여기에 인생의 진면목과 창조의 기쁨이 있다고 말이다.




본디 박사(博士)란 여러 분야에 걸쳐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고 학문적 소양도 높은 이를  말한다. 지금에 와서는 한 분야에 능통한 자라면 너나 나나 모두 박사이지만 말이다.


정종은 서양철학에 입문한 뒤 우리 겨레 사상의 근간이 된 공자사상에 심취하여 동양철학자로서 거듭난 학자이다. 동서양의 철학사상을 오가며 인문철학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그는 또, 음악을 사랑하는 예인(藝人)이자 산타기를 지극히 좋아했던 어진 사람(仁者)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온버림 정종이야말로 진정한 박사의 모습을 구현한 이가 아닐까 싶다.


영광을 떠난 지 반세기 만인 1998년 나이 여든 넷에. 중학때부터 굶주리며 사 모은 애장서 약 5천권을 영광군립도서관에 기증하며 고향땅을 다시 밟은 그는 여전히 집필활동은 물론 독서도 하고, 우리 고장 문예진흥을 위해 힘쓰고 있다. 이제 아흔셋이라는 나이와 극도의 약시로 인해 그 모든 것을 당신 마음껏 행하고 누리지 못한다지만 보이지 않는 눈 대신 귀를 열어 독서를 하고, 아직은 성한 두 다리로 영광땅 한길 한길 더듬어 가며 고향의 미래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염려하며 깊이 사색하는 어른이다. 


시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던 3년전부터는 카톨릭 점자도서관에서 제공되는 소설테이프를 틀어가며 이독(耳讀: 소리로 읽기)에 열중했다. ‘젊은 날 이미 섭렵했던 소설들이지만 세상경험이 충만한 가운데 접하는 소설을 또 읽는 재미는 다른 맛을 느끼게 해준다’고 귀뜸해 준다.  그 방대한 독서량을 바탕으로 요즘도 대학에 초빙되어 인문철학의 화두가 되어온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와 ‘세계 소설문학의 흐름’이라는 주제로 젊은 청년들을 향해 강연을 한다. 며칠 전에도 원광대 철학도들에게 그의 삶과 철학을 설파하고 돌아왔다. 얼마남지 않은 이생의 순간들을 젊은이들과 함께 가치 있는 시간들로 만들려는 백발 노옹의 열정이 대단할 뿐이다.




영광사람으로서의 정종




“영광에서는 날 부르지 않아요. 이 고장 청소년들과도 삶에 대해... 철학에 대해... 격의 없는 대화를 하고 싶은데 말이지요....인생고별 강연이라고 할까요?(웃음)”


정작 고향인 영광이 당신을 활용하지 않고 있음에 적이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한다. 그는 또 근현대 한국 시조문단의 거장인 조운의 생가를 장진기 시인이 사재로 낙찰받은 지 7년이 흐른 시점에도 별 진전이 없는 영광의 문화예술판에 대해 우려했다.


“여기 조운생가 300평을 군에서 매입해 문화공간으로 조성해야 합니다. 강진군이 영랑생가 보존에 얼마나 열성적입니까? 그동안 영광에는 「문화군수」가 없었다는 증거이지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은 허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군에서 조운시조문학상을 제정하여 1년에 한번씩이라도 전국적인 규모로 작품을 모집, 시상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는 날엔 전국 시인들이 영광으로 운집하게 되고 그로해서 우리 영광이 한국시조문학의 르네상스를 여는 지역이 되는 것 아닙니까?”








고향에 돌아 와 9년을 지내오며 그는 “문학도, 예술도 없는 마치 황무지가 된 듯한 영광과 자주 대면하는 것 같다”고 했다. 공자의 “근자열 원자래(近者悅 遠者來 -가까이(영광)에서 사는 사람을 즐겁게 하고 먼 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모여들게 하는 것)를 인용하며 지역의 인재를 키워 영광사람이 이곳에 사는 것을 즐겁게 하려면 먹고 살수 있고 살 가치가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문화적 부가가치를 소홀히 하는 지역분위기를 엄히 꾸짖으면서 문화예술의 향기가 만연한 살맛나는 영광의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子欲養而親不待’라 했다. 자식이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려는데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흥망성쇠가 있듯, 인생도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다가오는 것, 세월 앞에서 기다려주지 않는 육친을 떠나보내며 탄식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온버림 정종은 자신의 인생 말년을 고향 영광에서 후회없이 보내고자 귀향한 것이다. 고향의 인재를 만나고 싶어하고, 고향의 문화예술부흥이 이루어지길 염원하고, 선두주자정신, 저항정신이 높았던 지역의 기풍을 다시 살리자고 지역 후배들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또 도로마다 우리 영광의 중요 인물들의 이름을 붙여 지역혼을 부활시키길 바랐다. 수은 강항, 소태산 박중빈, 조운, 해인 위계후, 현암 이을호, 소청 조희관 등... 거리 거리마다에 새겨진 이들의 선구적 정신과 높은 예술혼을 고향후배들이 밟아 깨워 오늘날에 정신적 좌표로 되새겨 주길 바란 것이다. 


집안의 부모님이 있다면 그 고을엔 어른이 있다. 정종 박사는 친부모같이 공경해야 할 지역의 어른이 아닐까?     


누구든 남루한 옷가지에 배낭하나 매고, 흰 수염 날리며 거니는 노옹을 만나면 ‘박사님! 함께 걸으실까요?’라며 그분과 진정 마음의 교유를 시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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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버림 정종 박사가 걸어온 길



1915년 영광 출생


1929년 영광보통학교 졸


1935년 배제 고등 보통학교 졸


1938년 중앙 불교 전문학교 졸


1941년 일본 동양대학 문학부 철학과 졸


1942년 경성보육학교 교감


1844년 영광유치원 원감


1945년 영광민립중학교 교감


1948년 광주 의과대학 예과 부교수


1952년 전남대학교 문리과 대학 철학과 교수


1958년 동국대학교 문리과 대학 철학과 교수


1975년 철학박사(동국대학교 대학원)


1980년 한국 공자학회 부회장


1981년 원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철학과 교수


1985년 한국 공자학회부회장


1991~1995년 전남대학교 대학원 강사


2000년 제 1회 영광문화상 수상


2006년 영광군민의 상 수상


1998년이후~ 현재 영광 도동리


        청우아파트 거주



저서




1973년 轉換期의 哲學 (訓福文化社)


1975년 孔子思想의 人間學的 硏究(東大出版部)


1980년 孔子의 敎育思想(集文堂)


1985년 더불어 고뇌하는 우리의 마당(思社硏) 


1986년 論語와 孔子(圓光大 出版局)


1994년 고향이 시인들과 시인들의 고향(동남풍)


1995년~1999년 나의 삶 〈상․중․하〉(동남풍)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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